정은혜 작가와 남편 조영남, 어머니 장차현실 작가가 함께 있는 모습

출처 : SONOW

방 안에 갇혔던 '은혜씨', 그림으로 세상과 만나다

"안녕하세요. 저는 '니얼굴 은혜씨' 작가님이고,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에서 한지민의 쌍둥이 언니 '영희'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지난 14일 서울 중구 경향신문사에서 정은혜 작가가 또박또박 인사했다. 다운증후군을 가진 정 작가는 화가이자 배우로, 지금까지 캐리커처를 그린 인물만 5000명이 넘는다.

한때 세상의 시선을 피하느라 방에 틀어박혀 뜨개질만 하던 '은혜씨'는 이제 없다. 그가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 '니얼굴- 은혜씨' 구독자는 27만명이 훌쩍 넘는다. 20대가 된 정 작가의 세상이 캄캄해졌을 때, 타인의 시선은 '강박'이 됐고, 방에 틀어박혀 스스로를 가둬버렸다. 정 작가는 책 <은혜씨의 포옹>에서 이때의 절망을 '동굴'이라고 표현했다.

그를 세상 밖으로 끌어낸 건 그림이었다. 미대 출신 만화가인 어머니 장차현실 작가는 당시 생계를 위해 화실을 운영했는데, 정 작가에게 하루는 잡지 속 여자 향수 모델을 그려보게 했다. "그린 걸 보고 깜짝 놀랐어요. 사람 얼굴을 이렇게 잘 그리네…" "2013년 2월23일" 정 작가는 12년 전 처음 그림을 그린 그날을 날짜까지 정확히 기억했다.

5000명의 얼굴을 그리며 찾은 자신의 길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건 2016년 8월부터다. 경기 양평 문호리 리버마켓에 캐리커처를 그려주는 '니얼굴'이란 이름의 노점을 열고 수많은 사람의 얼굴을 그렸다. 그렇게 그는 세상과 다시 연결됐다.

'니얼굴'이란 이름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 장차 작가는 "부스 이름을 뭘로 할까 하고 있는데, 마침 중학교 윤리 선생님인 조카가 집에 놀러 왔어요. '요즘 애들이 많이 쓰는 말이 뭐냐'고 물어봤더니 '니 얼굴' 그러더라고요"라며 "예술이라고 하면 권위 있는 뭐 이런 걸로 어렵게만 생각하잖아요. 반말처럼 들리는 '니 얼굴'이란 세 글자가 그런 것들을 깨버리는 통쾌함이 있었어요"라고 설명했다.

정 작가에게 그림의 의미를 묻자 "나의 전부"라고 답했다. "그림을 그리면 그 사람들이 저를 기억해주고 생각하니까요." 현재 그는 '어메이징 아웃사이더 아트센터' 대표를 맡고 있으며, 매일 발달장애인 작가 14명과 함께 그림 작업을 하며 월급을 받는다. 지난해 수상한 포니정 영리더상의 상금을 이 센터 계약금으로 썼다고 한다.

"오빠가 먼저 고백했어요" 운명 같은 만남

지난 5월 지적 장애가 있는 조영남과 결혼식을 올려 많은 응원을 받은 정은혜 작가. 두 사람의 만남은 운명적이었다. "2023년 2월1일 날 정확해요. 그날 오빠가 (일자리에) 들어왔어요" 정 작가는 남편과 처음 만난 날을 정확히 기억했다.

"세 분이 왔는데 그중에 오빠가 있었는데, 처음부터 나를 좋아했고 관심을 보였어요. 오빠가 먼저 고백했어요. '은혜 작가님 저랑 결혼해 줄 수 있어요?' 그 말을 듣고 그 자리에서 바로 '좋다'고 대답했어요. 그리고 꽁냥꽁냥 연애질만 했어요." 조영남은 "야채나 채소를 주로 그려요. 오빠 그림 요즘 많이 좋아졌어요. 오빠는 뭐든지 잘하는 사람이에요. 밝고 웃음이 많아요"라는 정 작가의 애정 어린 평가를 받았다.

최근 SBS 예능 프로그램 <동상이몽2- 너는 내 운명> 출연으로 화제가 된 두 사람. 정 작가는 "사람들이 알아보고 사진 찍자 하는 분도 많고, 사인해달라고 하는 분들이 더 많죠"라며 "뭘 꼭 그렇게, (저) 좋다고 하는데 그럴 순 없죠"라고 유쾌하게 답했다.

현실적 한계와 사회적 지원의 필요성

결혼 후 가족을 떠나 둘만의 보금자리에서 생활하는 두 사람이지만, 완전한 독립에는 한계가 있다. 방송에서 아이를 갖고 싶지만 '장애인 아이를 낳을까봐 걱정된다'는 얘기가 나왔을 때, 정 작가는 "아기 안 가지기로 했어요. 오빠가 나이도 많고"라고 말했다. 조영남은 "장모님한테 떠맡길 수 없지 않냐. 돌아가시면 우리가 뭘 어떻게 하나"며 속마음을 털어놨다.

장차현실 작가는 현재 장애인 지원 시스템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각각 개인의 활동지원사들을 쓰는데 시간이 정해져 있는 데다 야간은 지원이 안 되어요. 활동 지원 선생님이 아침에 오셔서 출근시켜주거든요. 저녁에도 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해 둘만 있으니 불안하죠"라며 지원 시간 확대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또한 장애인 일자리의 지속성 문제도 제기했다. "저희가 확보한 일자리는 매년 종료되고, 평가를 거쳐 선발되어야만 다시 일을 할 수 있어요. 가장 중요한 것은 일자리가 지속적이어야 합니다." 30명이 1년 일하는 예산이 3억5000만원인데, "이 돈이면 30명을 살립니다. 이 문제는 장애인 한 사람을 살리는 게 아니라, 가족 전체의 삶을 살리는 일입니다"라고 강조했다.

"꿈을 다 이뤘다"는 작가의 새로운 바람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을 묻자 정은혜 작가는 "꿈을 다 이루었기 때문에 저는 없어요"라고 답했다. 대신 그는 다른 바람을 전했다. "(장애인들이) 일하면서 돈도 벌고 좋은 사람 만나 연애도 할 수 있게 해 주시면 좋겠어요."

정 작가의 어머니 장차현실 작가는 경기 장애인부모연대 양평지부 회장을 맡고 있다. 은혜가 스무 살이 됐을 때 어려움을 겪으며 자신도 뇌졸중이 온 후, 면사무소에서 받은 지원이 한 달에 3만원뿐이었던 경험을 계기로 운동을 시작했다고 한다. "국가가 안 해주면 부모들이라도 해야지 어쩌겠어요"라는 각오로 장애인 권익 향상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정은혜 작가는 2024년 발달장애인에 대한 사회적 편견을 줄이는 데 기여한 공로로 '포니정 영리더상'을 수상했다. 그의 이야기는 장애인도 꿈을 이루고 사랑하며 당당히 살아갈 수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