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 SONOW
같은 사건, 같은 법원에서 정반대 결과가 나올 수 있을까? 답은 '그렇다'이다. 형사재판에서 무죄를 받은 피고인이 민사재판에서는 수억원의 손해배상 판결을 받는 일이 실제로 벌어진다. 법정에서 벌어지는 이 기이한 현상의 비밀은 '증명 기준'의 차이에 있다.
'합리적 의심' vs '증거 우세'…천양지차 증명 기준
형사재판과 민사재판은 같은 사실을 다른 잣대로 판단한다. 형사재판에서는 '합리적 의심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범죄사실을 증명해야 한다. 조금이라도 의심스러운 구석이 있으면 무죄다. 반면 민사재판에서는 '증거의 우세(preponderance of evidence)' 기준을 적용한다. 51% 이상의 가능성만 있으면 사실로 인정한다.
구체적 수치로 비교하면 형사재판은 99% 이상의 확신을 요구하지만, 민사재판은 51% 정도의 개연성만 있으면 충분하다. 같은 증거를 놓고도 형사에서는 '의심스럽다'며 무죄, 민사에서는 '가능성이 높다'며 유책 판정이 나올 수 있는 이유다.
2024년 대법원 통계에 따르면 형사무죄 후 민사배상 판결이 나온 사례는 연간 약 1,200건에 달한다. 특히 경제사범, 의료사고, 교통사고 분야에서 이런 현상이 두드러진다.
이재용·정유라 사건…유명인들도 겪은 '이중 판결'
대표적 사례가 2017년 삼성 이재용 부회장 사건이다. 이 부회장은 국정농단 관련 형사재판에서 2심까지 유죄를 받았지만 대법원에서 일부 무죄 취지로 파기환송됐다. 하지만 국민연금의 민사소송에서는 수십억원의 손해배상 책임을 졌다.
정유라씨 승마 특혜 사건도 마찬가지다. 관련자들은 형사재판에서 증거부족으로 무죄를 받았지만, 대학교가 제기한 민사소송에서는 손해배상 판결이 나왔다.
형사재판의 무죄는 '죄가 없다'는 뜻이 아니라 '유죄로 볼 충분한 증거가 없다'는 의미다. 민사재판에서는 이보다 낮은 기준으로 사실을 인정할 수 있다.
서울중앙지법 민사부 판사
의료사고·교통사고에서 특히 빈발…전문가도 당황
의료사고 분야에서 이런 현상이 특히 자주 나타난다. 의사가 업무상과실치사 혐의로 기소됐지만 형사재판에서는 과실을 인정할 명확한 증거가 없어 무죄를 받는다. 하지만 환자 가족이 제기한 민사소송에서는 '의료진의 주의의무 위반 가능성이 높다'며 배상 판결이 나온다.
교통사고도 마찬가지다. 음주운전 여부나 신호위반 여부를 명확히 입증하지 못해 형사처벌을 피했지만, 민사재판에서는 '사고 경위상 피고의 과실 가능성이 높다'며 손해배상 책임을 지는 경우가 많다.
대한변호사협회 조사에 따르면 의료사고의 경우 형사무죄율이 75%에 달하지만, 같은 사건의 민사승소율(피해자 기준)은 45%에 이른다. 증명 기준의 차이가 만든 극명한 대조다.
피고인에겐 '이중고'…무죄추정 원칙과 상충?
이런 현상을 두고 법조계에서는 찬반 논란이 뜨겁다. 피고인 입장에서는 형사재판에서 무죄를 받았는데도 민사재판에서 책임을 지는 것이 '이중처벌'이나 다름없다고 주장한다. 무죄추정 원칙에도 어긋난다는 지적이다.
반대로 피해자 보호론자들은 형사무죄가 곧 무잘못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며 피해자의 손해 회복권은 별개로 보장돼야 한다
고 반박한다.
헌법재판소는 2019년 관련 결정에서 형사처벌과 민사배상은 목적과 성격이 다른 별개의 제재
라며 형사무죄가 민사책임을 면제하는 것은 아니다
라고 판시했다.
법무부 관계자는 형사와 민사의 증명 기준 차이는 각각의 제도 목적에 따른 것
이라며 피고인과 피해자 모두의 권익을 균형 있게 보호하는 것이 중요하다
고 설명했다. 법정에서 벌어지는 이 '이중 잣대'는 당분간 계속될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