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택항 컨테이너 터미널과 한미 무역 협정 체결 장면

출처 : SONOW

25%→15% 관세 인하 성취, 하지만 3500억 달러 투자 약속의 무게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7월 30일(현지시간) 한국산 수입품에 대해 당초 위협했던 25% 대신 15% 관세를 부과하기로 발표하면서, 한국 정부의 막판 협상이 일단 성과를 거두었다. 이재명 대통령은 페이스북을 통해 "큰 고비를 넘었다"며 환영 입장을 밝혔고, 8월 1일 고율 관세 발효를 앞둔 시점에서 한국은 일본, 유럽연합과 동등한 15% 수준의 관세율을 확보했다.

하지만 이번 합의의 핵심은 한국이 약속한 대가에 있다. 한국은 향후 3500억 달러 규모의 미국 내 투자1000억 달러 규모의 미국산 에너지 구매를 약속했다. 특히 3500억 달러 투자는 조선 분야 1500억 달러, 반도체·원자력·배터리·바이오 분야 2000억 달러로 구성되며, 하워드 루트닉 미국 상무장관은 "투자 수익의 90%가 미국인에게 돌아갈 것"이라고 명시했다.

시티은행 김진욱 이코노미스트는 "헤드라인 수치는 미국의 큰 승리처럼 보이지만, 세부사항은 한국에 유리해 보인다"고 평가했다. 실제로 한국 정부는 쌀과 쇠고기 시장 추가 개방은 없다고 밝혔으며, 식품 규제 관련 미국 요구사항에 대해서는 지속 협의하기로 했다. 또한 자동차 관세도 기존 25%에서 15%로 인하되어 현대차, 기아 등 한국 완성차 업체들의 부담이 크게 줄어들 전망이다.

한국의 지난해 대미 무역흑자는 557억 달러로 전년 대비 25% 증가해 사상 최대를 기록했다. 이는 트럼프 행정부가 한국을 무역 불균형 해소 대상국으로 지목한 주된 이유이기도 하다. 한국 정부는 이번 협상을 통해 일단 최악의 시나리오인 25% 관세 부과를 피했지만, 약속한 투자와 에너지 구매가 실제로 어떤 방식으로 이행될지는 여전히 불투명한 상황이다.

투자 재원과 이행 조건의 불확실성,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

이번 합의에서 가장 큰 쟁점은 3500억 달러라는 천문학적 투자 규모의 현실성이다. 김용범 대통령실 정책실장은 "모호함이 좋다"고 언급하면서도 "자금 사용에 대한 안전장치는 확보했다"고 밝혔지만, 구체적인 재원 조달 방식이나 이행 시기, 구속력 있는 조건 등은 여전히 명확하지 않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기존 한국 기업들의 투자 계획도 이 펀드에 포함될 것"이라고 설명했는데, 이는 완전히 새로운 투자가 아닌 기존 계획의 재포장 성격이 강함을 시사한다. 실제로 협상 막판인 7월 30일 삼성전자가 테슬라와 165억 달러 규모 반도체 공급 계약을, LG에너지솔루션이 43억 달러 규모 배터리 공급 계약을 체결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해석된다.

정인교 전 통상교섭본부장은 "한국은 최악의 상황을 피했지만, 3500억 달러가 제대로 집행되지 않으면 협정에 대한 평가가 달라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특히 조선업 분야 1500억 달러 투자는 현재 한국 조선업계 전체 매출 규모를 고려할 때 상당히 큰 규모로, 실제 이행 가능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에너지 구매 측면에서는 상황이 다소 현실적이다. 한국은 향후 3.5년간 LNG, LPG, 원유, 소량의 석탄 등 1000억 달러 상당의 미국산 에너지를 구매하기로 했는데, 김용범 실장은 "이는 우리의 통상적인 수입 규모 내"라고 설명했다. 다만 기존 중동 중심의 에너지 수입 구조에서 미국산 비중이 늘어나는 "약간의 변화"가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루트닉 상무장관이 강조한 "수익의 90%가 미국인에게"라는 조건도 해석상 논란의 여지가 있다. 한국 측은 이를 "일부 수익을 재투자할 수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이고 있어, 향후 구체적인 수익 배분 방식을 놓고 추가 협상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한국 산업계의 엇갈린 반응과 중장기 전략적 함의

한국 산업계는 이번 합의에 대해 복합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우선 자동차 업계는 관세율 인하를 환영하고 있다. 현대차와 기아는 미국 내 현지 생산 확대 계획을 가속화할 것으로 예상되며, 특히 전기차 부문에서의 투자 확대 가능성이 높아졌다. 반도체 업계 역시 삼성전자의 테슬라 계약처럼 대형 프로젝트를 통해 미국 내 입지를 강화할 기회를 얻었다.

반면 조선업계는 신중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1500억 달러라는 투자 규모는 현재 한국 조선업계 전체 연간 수주액의 3-4배에 달하는 수준으로, 단순히 선박 건조만으로는 달성하기 어려운 규모다. 업계에서는 해상풍력, 해양플랜트, 군함 건조 등 고부가가치 분야로의 확장이 필요할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한국 정부는 이번 협상 과정에서 비관세 장벽은 방어하면서도 관세율을 일본, EU와 동등한 수준으로 맞추는 데 성공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특히 반도체와 의약품 수출이 다른 국가와 차별받지 않도록 한 것은 긍정적 성과로 평가된다. 다만 철강, 알루미늄, 구리 등은 이번 협정 대상에서 제외되어 향후 추가 협상이 필요한 상황이다.

정치적으로는 6월 취임한 이재명 대통령에게는 첫 번째 중요한 외교 성과가 되었다. 윤석열 전 대통령이 계엄령 시도로 탄핵된 후 조기 대선을 통해 집권한 이재명 정부로서는 대미 관계 안정화를 통해 국정 동력을 확보하는 계기가 되었다. 트럼프 대통령도 이재명 대통령을 "향후 2주 내" 백악관으로 초청하겠다고 발표해, 양국 정상간 첫 만남에 대한 기대감을 높이고 있다.

글로벌 통상 질서 재편 속 한국의 전략적 선택과 과제

이번 한미 무역협정은 단순한 양자 거래를 넘어 글로벌 통상 질서 재편 과정에서 한국의 전략적 포지셔닝을 보여주는 사례다. 트럼프 행정부는 8월 1일을 기점으로 전 세계에 고율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위협하며 개별 국가들과의 협상을 통해 "거래"를 추진하고 있다. 한국이 일본에 이어 두 번째로 협정을 체결함으로써, 적어도 단기적으로는 통상 분쟁의 최전선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중장기적으로는 여러 과제가 남아있다. 우선 약속한 투자와 에너지 구매가 실제로 이행되지 않을 경우 미국의 추가 압박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특히 3500억 달러 투자의 상당 부분이 기존 계획의 재포장이라면, 실질적인 신규 투자 효과는 제한적일 수 있다. 또한 "수익의 90%가 미국인에게"라는 조건이 어떻게 해석되고 이행되느냐에 따라 한국 기업들의 실질적 이익이 달라질 수 있다.

에너지 안보 측면에서도 고려할 점이 있다. 1000억 달러 규모의 미국산 에너지 구매는 기존 중동 중심의 에너지 수입 구조를 다변화하는 긍정적 효과가 있지만, 동시에 미국에 대한 에너지 의존도가 높아질 위험도 있다. 특히 향후 미중 갈등이 심화될 경우 한국이 양국 사이에서 어려운 선택을 해야 할 상황이 올 수 있다.

산업 정책 측면에서는 이번 협정이 한국의 제조업 고도화와 글로벌 공급망에서의 위상 강화에 기여할 가능성이 있다. 특히 반도체, 배터리, 조선 등 한국의 주력 산업이 미국 시장에서 안정적인 기반을 확보할 수 있다면, 장기적으로는 산업 경쟁력 강화로 이어질 수 있다. 하지만 이를 위해서는 단순한 제조업 확장을 넘어 연구개발, 핵심 기술 확보, 인재 양성 등 종합적인 산업 생태계 구축이 필요하다.

이재명 정부로서는 이번 성과를 바탕으로 대중국, 대EU 등 다른 주요국과의 경제 관계도 재정립해야 하는 과제가 남아있다. 특히 중국이 한국의 대미 협력 확대에 어떤 반응을 보일지, 그리고 이것이 한중 경제 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면밀히 모니터링해야 할 부분이다. 결국 이번 협정의 진정한 성공 여부는 앞으로 수년간의 이행 과정에서 결정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