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주호 한수원 사장이 국회 산자위에서 답변하는 모습

출처 : SONOW

체코 원전 수주 과정에서 드러난 불공정 합의 조항

한국수력원자력과 한국전력이 체코 두코바니 신규 원전 수주를 위해 미국 웨스팅하우스와 올해 1월 체결한 '글로벌 합의문'에 포함된 독소 조항이 공개되면서 원전 업계와 정치권에 큰 충격을 주고 있다. 해당 합의문에는 한국이 원전 1기를 수출할 때마다 웨스팅하우스에 총 1조1400억 원을 지불해야 한다는 조항이 명시되어 있어, 향후 50년간 우리나라의 원전 수출 경쟁력과 기술 주도권을 심각하게 훼손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한수원·한전은 원전을 수출할 때마다 1기당 6억5천만 달러(약 9천억 원) 규모의 물품·용역을 웨스팅하우스에서 구매해야 하고, 추가로 1억7천500만 달러(약 2400억 원)의 기술 사용료를 지불해야 한다. 이는 원전 1기 수출 시마다 웨스팅하우스에 약 1조1400억 원을 의무적으로 지불해야 함을 의미한다.

더욱 심각한 것은 기술 자립에 대한 제약이다. 한국이 소형모듈원자로(SMR) 등 모든 차세대 원전을 독자 수출하려면 웨스팅하우스의 기술 자립 검증을 통과해야 하는 조항이 포함되었다. 이는 향후 50년간 우리 기업이 독자 기술 노형을 개발하더라도 웨스팅하우스의 기술을 유출한 것이 아닌지 사전 검증을 받아야 함을 의미하며, 웨스팅하우스의 판단에 따라 수출 여부가 결정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지역적 제약도 상당하다. 북미(미국·캐나다·멕시코), 체코를 제외한 유럽연합(EU) 전체, 영국, 일본, 우크라이나 시장은 웨스팅하우스만 독점 수주 경쟁이 가능하며, 한수원·한전은 중동, 동남아시아(필리핀·베트남), 남아프리카, 남미(브라질·아르헨티나) 등 일부 국가에서만 원전 수주 활동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윤석열 정부의 성과 압박과 법적 분쟁의 배경

이러한 불리한 조건을 수용하게 된 배경에는 한수원과 웨스팅하우스 간의 복잡한 법적 분쟁이 있었다. 웨스팅하우스는 2022년 10월 미국 연방법원에 '한국형 원전이 미국 원자력에너지법에 따른 수출 통제 대상인 웨스팅하우스 기술을 활용했다'며 지적재산권 침해 소송을 제기했다. 한국형 원전(APR1000)에 자사의 원천 기술이 포함되었으니 미국 정부의 허가 없이 수출하지 못하게 해달라는 소송이었다.

2024년 7월 한수원이 미국 웨스팅하우스, 프랑스전력공사(EDF)와의 경쟁에서 체코 원전 수주 우선협상자로 선정되자, 웨스팅하우스는 한 달여 후인 8월 체코 정부에 '한수원은 체코 원전 사업을 수주할 자격이 없다'며 항의서를 제출했다. 이로 인해 수주가 일시 보류되는 상황까지 발생했다.

원전업계 관계자에 따르면, 윤석열 정부로서는 체코 원전 수주 성과가 시급했기 때문에 독소 조항이 포함된 계약을 맺고 웨스팅하우스와의 법적 분쟁을 끝낼 수밖에 없었다는 분석이 나온다. 실제로 한수원과 한전은 2024년 11월 비공개 이사회를 열고 웨스팅하우스와의 비밀 합의안을 가결했으며, 올해 1월 양자 협정을 체결함으로써 분쟁을 종료하고 6월에 체코 원전 사업을 수주할 수 있게 되었다.

황주호 한수원 사장은 19일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에서 '받아들이는 입장에서 정당하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 수준은 감내하고도 이익을 남길 만하다고 생각한다'고 답변했다. 민주당 김원이·김정호 의원이 '지나치게 불리한 내용 아니었나'라고 묻자 '불리한이라는 단어에 동의하지 못하겠다'고 반박했다.

원전 산업 경쟁력과 기술 주도권 상실 우려

전문가들은 이번 합의가 단순히 체코 원전 수주에 국한되지 않고 향후 50년간 한국의 원전 산업 전반에 미칠 영향을 심각하게 우려하고 있다. 특히 기술 자립 검증 조항은 한국이 독자적으로 개발한 차세대 원전 기술에 대해서도 웨스팅하우스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는 것으로, 사실상 한국의 원전 기술 주도권을 포기한 것이라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원전 및 에너지 전문가인 황재훈 변호사는 '지재권 협약은 전체적으로 봤을 때 미끼 상품이고, 이를 지렛대로 해서 웨스팅하우스 주식 매도를 노리는 것이 본 게임일 것'이라고 분석했다. 현재 언론에 보도된 내용이 최종안인지 확인할 필요가 있지만, '실질적인 협상력은 최종안과 확인된 버전에서 큰 차이는 없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번 합의로 인해 한국은 약 26조 원 규모의 체코 두코바니 원전 프로젝트를 수주했지만, 장기적으로는 원전 수출 시장에서의 경쟁력과 기술적 독립성을 상당 부분 양보한 것으로 평가된다. 특히 글로벌 원전 시장에서 가장 유망한 북미와 유럽 시장에서 배제됨으로써 향후 수출 확대에 근본적인 제약을 받게 되었다는 지적이다.

정부 차원의 진상조사와 향후 과제

논란이 확산되자 대통령실은 산업통상자원부에 진상조사를 지시했다. 강유정 대변인은 19일 브리핑에서 '산업통상자원부가 체코 원전 수출에 대해 국민의 의구심을 해소할 수 있도록 진상을 파악해 보고하라는 비서실장의 지시가 있었다'며 '웨스팅하우스와의 계약 과정에서 법과 규정이 근거가 있는 것인지, 원칙과 절차가 준수되었는지 조사하라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황주호 사장이 19일 국회에서 폴란드 원전 사업과 관련해 '일단 철수한 상태'라고 밝힌 것도 이러한 지역적 제약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폴란드는 EU 회원국으로 이번 합의에 따르면 웨스팅하우스의 독점 수주 경쟁 지역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이번 사건은 정부가 단기적 성과에 급급한 나머지 장기적인 국가 이익과 산업 경쟁력을 훼손하는 계약을 체결했다는 비판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원전 산업은 한국의 주력 수출 산업 중 하나로, 이번 합의가 미치는 파급효과는 향후 수십 년간 지속될 것으로 예상된다. 따라서 정부 차원에서 철저한 진상조사와 함께 향후 유사한 사태가 재발하지 않도록 하는 제도적 보완책 마련이 시급하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