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 SONOW
미·중 양강 구도를 넘어 'AI 중견국' 부상, 다극 체제 전환의 동력
세계 인공지능(AI) 지정학 지도가 급격히 변화하고 있다. 미국과 중국이라는 두 거대한 양강이 만들어낸 중력권 바깥에서, 한국을 비롯한 여러 국가들이 각자의 속도와 궤적을 찾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들을 'AI 중견국(AI middle powers)'이라 부른다. 미중 양강의 틈바구니에서 주권적 AI 역량을 키우면서, 때로는 두 강대국에 도전하고 때로는 이슈별로 기민하게 정렬해 자국의 기술·산업 생태계를 선진국 수준으로 끌어올리려는 국가들이다.
이원태 국민대 특임교수(전 KISA 원장)는 "AI 중견국들의 경쟁은 단순한 '세계 3위' 순위 다툼이 아니라 양강 구도를 다극 체제로 바꾸는 동력을 둘러싼 훨씬 더 깊은 승부"라고 분석했다. AI 패권이 양강에서 다수 국가로 분산될 수 있는지, 그 새로운 질서를 누가 설계하고 주도할 것인지에 관한 경쟁이 조용하지만 치열하게 펼쳐지고 있다는 것이다.
11월 경주에서 열릴 APEC 정상회의에서도 AI 거버넌스 논의가 핵심 의제로 다뤄질 예정이다. 한국은 이 자리에서 AI 안전성 평가 기준과 데이터 신뢰 프레임워크 등 규범 외교 이니셔티브를 선도할 기회를 맞고 있다. 표준을 설계하는 국가는 단순히 규칙만 정하는 것이 아니라 '시장 접근권'과 '신뢰의 프리미엄'까지 함께 확보하게 되기 때문이다.
순위가 아닌 '질적 3강' 지향, AI 기본사회로 국민 모두가 수혜자 되어야
'세계 3위'라는 숫자보다 중요한 것은 '질적 세계 3강'이 되는 것이다. 국가 전반의 AI 활용 역량과 산업·사회의 생산성 향상을 통해 세계가 인정하는 '실력의 3강'으로 자리매김하는 것이 진정한 목표다. 순위표상의 숫자가 아닌 실제 국민 삶의 변화와 산업 경쟁력 향상으로 입증되는 AI 강국을 만드는 것이다.
한국은 이미 제조업 세계적 경쟁력, 빠른 의료 서비스, K-컬처 글로벌 영향력, 우수한 방위산업 품질, 효율적인 디지털 정부 등 뛰어난 강점을 보유하고 있다. 핵심은 "AI로 우리가 잘하던 것을 더 잘하는 나라"가 되는 것이다. 병원 접수대에서, 공장 생산라인에서, 교실과 관공서 업무 흐름에서, 영화·게임 스튜디오 창작 과정에서 AI가 "조용하지만 결정적"으로 생산성을 높이는 풍경을 일상화해야 한다.
이러한 일상의 작은 혁신들이 축적되어 숫자로 환원할 수 없는 '총량 경쟁력'을 만들어낸다. 그 핵심은 'AI 기본사회'라는 사회적 상상력이다. 소수 연구실이나 대기업 데이터센터만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 개개인이 AI의 수혜자이자 생산자가 되는 사회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다. 양질의 공공데이터와 투명한 규칙, 합리적인 위험관리 체계를 기반으로 국민 누구나 AI 도구를 활용하고 학습할 수 있는 기회를 보장하는 환경 조성이 관건이다.
중견국 연대 외교로 규범 설계 주도, 이재명 정부 AI 국가전략과 연계
한국이 지향해야 할 AI 강국의 모습은 대내적 역량 강화에만 그치지 않는다. 국제 무대에서 'AI 중견국 연대의 설계자'로 나서는 외교적 접근도 필요하다. 한국이 AI 안전성 평가 기준, 데이터 신뢰 프레임워크, 상호 인증 체계 등의 규범 외교를 선도한다면 기술 경쟁력과 국제 협상력을 동시에 얻을 수 있다.
언어나 산업 분야가 각기 다른 여러 AI 중견국들과 데이터셋 공동 구축, 시험베드 및 공공조달 연계 프로젝트 같은 연합체계를 상시 가동한다면, 한국은 더 이상 '따라가는 3위'가 아니라 '질서를 만드는 3강'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AI 분야 인재 풀 확대, 규제 체계의 사전허가에서 위험기반·사후책임 중심으로의 전환, 중소기업 AI 도입 여건 개선, 전력·반도체·클라우드 하드 인프라 확충 등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마침 새로 출범한 이재명 정부도 국민 모두가 AI를 일상에서 활용하는 'AI 기본사회' 실현을 국가 전략으로 선언했다. 그래픽처리장치(GPU)와 데이터 인프라를 조기 확충해 AI를 산업·공공 전 영역에 확산시키고, '모두의 AI'를 위한 인재 양성과 안전하고 윤리적인 AI 활용을 위한 제도 마련에 나서겠다는 청사진을 제시한 것이다. 새 정부의 이러한 AI 국가전략이 차질 없이 구현되어 정책적 뒷받침으로 작동한다면, 한국은 '랭킹'이 아닌 '실력'으로 세계 AI 3강 반열에 오를 수 있을 것이다.
반도체·K-컬처 강점에 'AI 증폭기' 결합, 성과의 나라로 도약 가능
결국 AI 중견국 경쟁의 승부처는 단순한 순위 싸움 너머에 있다. 장기적으로 진정한 승자는 순위표상의 3위를 차지한 국가가 아니라, 자국의 언어와 산업, 문화의 맥락에서 AI를 가장 능숙하게 활용하는 국민을 가장 많이 가진 나라일 것이다. 한국은 그런 조건을 충분히 갖추어 왔다.
우리의 강점인 방위산업과 문화, 제조와 의료 등에 'AI라는 증폭기'를 덧붙인다면 한국은 '점수의 나라'가 아니라 '성과의 나라'로 도약할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요란한 구호가 아니라 실질적 변화가 필요하다. 정책은 국민의 도구가 되고, 규범은 시장의 신뢰가 되며, 외교는 공동 프로젝트가 되어야 한다.
이처럼 국내 현장과 국제 무대를 동시에 움직이는 한국 주도의 '제3의 길'을 실천해나간다면, '세계 AI 3위'를 향한 소모적 레이스는 서서히 의미를 잃게 될 것이다. 우리의 목표는 분명하다. '랭킹 3위'가 아니라 '실력 3강'이 되는 것, 그리고 그 첫걸음은 이미 우리의 일상 속에서 시작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