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 운동에서의 기원'

1984년 10월, 관악경찰서 유치장면회실. 그곳에서 그는 처음으로 이해찬을 만났다. 이미 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과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 사건으로 오랫동안 징역살이를 겪고 있었다. 날카로운 눈빛은 그의 정치적 인지력을 드러냈다. 전두환의 비상계엄 직후, 형 유시민의 구속 이후 그가 말한 한마디가 모든 것을 명쾌하게 이해시켰다. “학생회 부활하려고 하니까 저놈들이 미리 싹 잘라버리려고 벌이는 수작이에요.” 이 해석은 당시 억울함과 불안 속에서 안정을 주었던 메신저였다.

1985년 민가협 출범식 사회 후, 그는 해직되었다. 고문 및 용공조작 공동대책위원회,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 사무실 강제 폐쇄 등에서 이해찬과 함께 활동했다. 전두환의 "4·13 호헌 조치"는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 (국본) 결성을 재촉하는 방아쇠가 되었다. 국본은 직선제 개헌이라는 최소한의 목표를 위해 최대 치의 연합이었다.

민주당 합류와 대결, 그리고 '6·10 국민대회'

민주당 합류 여부는 가장 치열한 논쟁 이었고, 이때 이해찬은 민통련 정책실 차장으로서 목사님, 신부님, 학생들을 설득했다. 민주당 합류로 집회 규모가 천문학적으로 부풀었다. 그는 '6·10 국민대회' 앞두고 회의 기록자, 서기를 맡았다. 한때, 이해찬은 그에게 정보원이 있었음을 알렸으며, 회의 장소를 바꿔야 한다는 경고도 전했다.

이해찬과 함께한 민주항쟁과 국회 진출

1987년 6월 민주항쟁은 한달 동안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계엄 준비에 나선 전두환은 국민들의 분출된 힘에 직면하여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해찬이 5공 청문회 스타로 부상했다. 그는 막대한 재력을 가진 인사 추천을 거부하며 냉혹한 이미지를 보여주기도 하였다. 그의 날카로운 비판과 민주주의 지지자라는 모습은 '버럭 해찬', '송곳'이라는 별명을 얻게끔 만들었다. 대선 출마를 권유하는 사람들은 적었고, 그는 자신에게 가장 적합한 길을 선택했다.


출처: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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