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화 투사 이후 '킹메이커' 된 길

1952년 충남 청양 출생한 이해찬 수석부의장은 서울대 사회학과를 졸업 후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첫 번째 옥고를 치렀습니다. 그는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까지 두 번이나 투옥되었으며, 성탄절 특사로 석방된 뒤에도 재야 활동가로서 학생운동권의 지주 역할을 하였습니다. 이후 약 40년간 제도권 내 민주개혁 세력의 중심에 서게 된 이해찬은 13대 총선에서 7선 의원으로 당선되어 거물급 정치인들을 물리치며 '청운'이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김대중부터 문재인까지, 네 차례 집권 기반 마련

김대중 정부 시절 그는 초대 교육부 장관으로서 야간 자율학습과 고교평준화 등 강력한 교육 개혁을 추진했으며, 2004년에는 참여정부 두번째 국무총리를 역임했습니다. '이해찬 세대'라는 비판도 있었지만 그의 능력은 부족하지 않았습니다. 노무현 정부 시절에는 ‘실세 총리’로 불리며 국정 전반을 통괄했고, 문재인 정부에서는 민주당 당대표를 역임하며 또 다른 성공적인 집권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그는 문재인 대통령과 깊은 신뢰 관계를 바탕으로 ‘실세 당대표’로서 활동하여 민주당의 승리를 이끌었습니다.

'거침없는 발언'으로 정치계를 뒤흔들기도

이해찬 수석부의장은 거침없는 발언으로 때때로 정치권을 뒤흔들기도 했습니다. 그는 '민주당 20년 집권론'을 언급하며 논란을 일으켰고, '버럭해찬', '호통 총리'라는 별명도 가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러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정치계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특히 이재명 대통령과의 교류는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이해찬계'를 통해 이재명 지지, 최후 임무

2018년 김대중 전 대통령과의 관계가 깊었던 이해찬은 이재명 대통령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며 그의 정치적 생존길을 열어주었습니다. 그는 당시 이재명 후보를 공개적으로 지지하는 등 '이해찬계' 의원들이 모여 이재명 대통령을 돕는 데 큰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최후의 임무로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에 임명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그의 정치적 업적이 다시 한번 주목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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