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산 문제로 난항 겪는 국가 AI 컴퓨팅센터 구축 사업.
네이버, SK텔레콤, KT, LG유플러스, 삼성SDS, LG CNS 등 국내 주요 정보기술(IT) 기업들이 참여 의향을 밝힌 '국가 인공지능(AI) 컴퓨팅센터' 구축 사업이 예산 확보 문제로 심각한 차질을 빚고 있다. 정부는 AI 경쟁력 확보를 위해 국가 차원에서 그래픽처리장치(GPU)를 대량으로 확보하고, 이를 연구기관과 스타트업의 연구개발(R&D) 기반으로 제공할 계획이었지만, 이를 뒷받침할 추가경정예산(추경) 편성이 지연되면서 연내 사업 추진이 불투명해진 상황이다.
유상임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은 7일 정부세종청사에서 열린 '국정 핵심과제 3차 국민 브리핑'에서 이러한 우려를 직접 표명했다. 유 장관은 "(예산이 없어) 올해 GPU가 들어오지 못할 수도 있다"며 "대학과 스타트업이 마음 놓고 GPU를 쓰지 못하면 R&D가 1년 늦어지고 이는 국가 AI 경쟁력이 4년 뒤처지는 결과를 낳는다"고 경고했다.
AI 모델과 서비스 개발에 필수적인 고성능 GPU는 단가가 매우 높을 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수요가 폭증하고 있어 확보 자체가 쉽지 않은 상황이다. 특히 최근 생성형 AI 개발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GPU 수급은 더욱 어려워지고 있다. 유 장관은 그동안 지속적으로 "국가 예산으로 GPU를 조달해 대학, 연구기관, 기업의 R&D를 지원해야 한다"고 강조해왔다.
대기업, 스타트업, 연구기관 100여개 참여 의향...추경 없이는 사업 진행 난망.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올해 1월 국가 AI 컴퓨팅센터 구축 계획을 공식 발표했다. 이 계획에 따르면 대기업, 스타트업, 지자체, 연구기관이 컨소시엄을 구성해 특수목적법인(SPC)을 설립하고, 민관이 공동으로 출자하여 GPU를 확보하는 방식으로 사업을 추진하게 된다. 현재까지 네이버, SKT, KT, LG유플러스, 삼성SDS, LG CNS 등 100여개 기업 및 기관이 참여 의향서를 제출했으며, 정부는 5월까지 신청을 받아 9월에 최종 사업자를 선정한 뒤 SPC를 공식 발족할 계획이다.
당초 정부는 9월 최종 사업자 선정에 앞서 추경을 통해 예산을 확보하고, 엔비디아의 최신 GPU 'H200'을 포함해 연내 최대 1만 장의 GPU를 선구매할 계획이었다. 이를 기존 민간 데이터센터에 설치해 빠르게 인프라를 제공하고, 2027년 국가 AI 컴퓨팅센터가 정식 개소하면 GPU 규모를 3만 장까지 확대한다는 구상이었다.
하지만 윤석열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이후 정부와 국회의 추경 편성 논의가 사실상 중단되면서 GPU 구매 시점이 1년 가량 미뤄질 위기에 놓였다. 이는 국내 AI 기술 발전에 심각한 타격을 줄 수 있는 상황이다.
대학과 스타트업이 마음 놓고 GPU를 쓰지 못하면 R&D가 1년 늦어지고 이는 국가 AI 경쟁력이 4년 뒤처지는 결과를 낳는다. - 유상임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
사전 GPU 구매 무산 시 국내 AI 연구 '보릿고개' 우려.
송상훈 과기정통부 정보통신정책실장은 브리핑 직후 기자와의 만남에서 "9월 사업자 선정 이후 GPU 구매를 시작하면 시기가 늦어질 수 있다"며 "추경이 통과되면 조기 주문이 가능해 제대로 된 연구 환경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정부는 사업자 선정 이후 인프라 구축을 위해 총 1000억원의 예산과 6720억원 규모의 저금리 대출을 투입할 방침이다. 여기에 참여 기업들이 2000억원을 공동 출자해 민관이 협력하는 구조로 계획되어 있다.
현재 파악된 국내 GPU 보유량은 약 2000개 수준이나, 이는 2022년 기준으로 집계된 수치여서 현실을 정확히 반영하지 못한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당시 조사에서는 네이버, 카카오 등 주요 플랫폼 기업이 조사에 응하지 않기도 했다. 송 실장은 "과거 조사에 불참한 기업들도 이번엔 참여하고 있으며, 실태 파악을 진행 중"이라고 덧붙였다.
국내 AI 스타트업들은 중국이나 미국 등 해외에 서버를 두고 GPU를 이용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국내 GPU 인프라가 부족하고 비용도 비싸기 때문이다. 국가 AI 컴퓨팅센터가 구축되면 국내 연구진과 기업들이 저렴한 비용으로 고성능 GPU를 활용할 수 있어 AI 연구 및 개발이 활성화될 것으로 기대되었으나, 추경 지연으로 이마저도 불투명해진 상황이다.
AI 경쟁력 확보를 위한 정치권의 초당적 협력 촉구.
정부는 현재 그래픽처리장치(GPU) 구매에 앞서 엔비디아 등 주요 공급업체들과 사전 협상을 진행 중이다. 세계적으로 GPU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는 상황에서 적시에 예산이 확보되지 않으면 주문 순서에서 밀려 납품 일정이 크게 지연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최신 GPU 모델은 선주문이 몰려 1년 이상 대기해야 하는 상황이라, 예산 확보 시점은 곧 GPU 확보 시점을 좌우하게 된다.
유상임 장관은 "올해가 AI R&D의 보릿고개가 되지 않도록 GPU 확보가 시급하다"며 "여야가 정쟁을 멈추고 미래를 위한 협의에 조속히 나서주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또한 이번 국가 AI 컴퓨팅센터 구축 사업이 단순한 인프라 구축을 넘어 국가 AI 경쟁력을 좌우할 중요한 프로젝트임을 재차 강조하며 정치권의 초당적 협력을 촉구했다.
일각에서는 글로벌 AI 기술 경쟁이 치열한 상황에서 국가 차원의 AI 인프라 확보가 지연될 경우, 한국이 AI 기술 발전에서 영구적으로 뒤처질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특히 미국, 중국, 유럽 등 주요국들이 막대한 예산을 투입해 AI 인프라를 확충하고 있는 가운데, 한국만 정치적 상황으로 인해 발빠른 대응에 실패한다면 그 격차는 더욱 벌어질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