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천히 늙고 싶은 2030세대, 저속노화 열풍과 100조원 시장의 등장

SONOW / 2025-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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웰빙·안티에이징 넘어선 '저속노화', 30대 아닌 20대가 주도.

서울 마포구에 거주하는 대학생 정시후 씨(22)는 최근 건강검진 후 충격적인 결과를 마주했다. 당 수치와 혈압이 평균보다 높게 나온 것이다. 군대 시절부터 이어진 군것질이 건강 지표에 악영향을 미쳤다고 판단한 정 씨는 식습관부터 대대적으로 개선하기 시작했다. 액상과당이 함유된 음료 대신 제로 슈거 제품을 선택하고, 백미 대신 잡곡밥을 먹는 등 생활 방식을 꼼꼼히 재정비했다.

경기도 수원의 직장인 임찬묵 씨(30) 역시 주 2~3회 갖던 술자리를 월 1~2회로 줄이고, 퇴근 후 음주 대신 헬스장에서 시간을 보내는 등 건강 중심 라이프스타일로 전환했다. 주말엔 친구들과 축구를 하고, 잡곡밥과 닭가슴살 위주의 식단을 유지하는 임 씨는 "직장 동료들을 보면 확실히 젊은 세대에서도 건강 관리에 대한 관심이 크게 높아졌다"고 말했다.

이들처럼 건강에 관심을 갖는 2030세대가 급증하면서 '저속노화(Slow-aging)'가 주목받고 있다. 저속노화는 노화를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인정하되 그 속도를 늦추는 데 집중하는 건강 트렌드다. 과거 중장년층 이상이 관심을 보이던 건강 관리가 이제는 20대와 30대, 심지어 10대 사이에서도 실천되고 있는 것이다.

왜 2030세대는 저속노화에 열광하는가?

'100세 시대'가 현실화되면서 젊은 세대의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다. 노인으로 살아야 할 기간이 이전 세대보다 크게 늘어남에 따라, 미리 노화를 늦춰놔야 한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 특히 요즘 1020세대는 부모 세대보다 10~15년 앞서 성인병과 만성피로, 호르몬 불균형 같은 문제를 겪는 '조기 노화' 현상이 발생하고 있다.

지난해 엠브레인 트렌드모니터가 전국 19~69세 성인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건강 관련 인식을 조사한 결과, 건강관리 노력 수준은 20대가 60대 다음으로 높았고, 저속노화에 시간과 비용을 투자할 의향을 묻는 질문에서는 30대 응답 비율(74%)이 전 세대에서 가장 높게 나타났다.

"최근 20·30대 사이에서 심혈관 계통 문제나 당 대사 이상이 발견되는 비율이, 눈에 띄게 늘고 있다. 100세 시대를 눈앞에 둔 청년층이 저속노화를 실천하는 건 자연스러운 대응이다." - 정희원 서울아산병원 노년내과 교수

2030세대의 저속노화 열풍은 소셜미디어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저속노화 트렌드를 이끈 정희원 교수의 유튜브 채널 '정희원 저속노화'는 개설 9개월 만에 구독자 40만 명을 눈앞에 두고 있으며, X(옛 트위터)와 인스타그램에서도 저속노화 관련 커뮤니티와 게시물이 급증하고 있다. 배달의민족 앱에서 저속노화 관련 키워드를 메뉴명으로 활용하는 가게는 최근 4년간 3배 가까이 증가했다.

카페인·술 대신 잡곡·견과류...일상 속 저속노화 실천법.

저속노화는 극단적인 건강 관리보다 지속 가능한 생활 습관 개선에 중점을 둔다. 혈당과 콜레스테롤, 염증 관리에 도움이 되는 식자재를 선택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흰 쌀밥이나 빵 같은 정제 탄수화물 대신 렌틸·퀴노아·카무트·파로 등 곡류를 넣은 잡곡밥, 붉은 고기보다는 콩이나 그릭 요구르트 같은 유제품으로 단백질 보충, 버터나 일반 기름 대신 올리브유와 불포화지방산이 풍부한 견과류 섭취가 권장된다.

식사 순서도 중요하다. 채소(식이섬유) → 단백질 → 탄수화물 순으로 섭취하면 혈당 급등을 막을 수 있다. '간헐적 단식'도 저속노화 트렌드 중 하나로, 아침 혹은 저녁 중 한 끼를 먹지 않고 하루 16시간 공복을 지키는 '16:8' 방식이 대표적이다. 카페인 섭취를 줄이기 위해 일반 커피 대신 디카페인 커피나 보리 커피, 보이차·도라지차 등 항산화 효과가 있는 음료로 대체하는 경우도 늘고 있다.

충분한 수면과 신체 활동 역시 저속노화의 핵심 요소다. 스마트폰 사용 시간을 줄이고 독서 같은 '노잼 활동'을 늘리는 것도 신체적, 정신적 건강에 도움이 된다. 정희원 교수는 "장시간 스마트폰 사용이나 음주·흡연 등은 당장은 즐겁지만 결과적으로 내 몸이 더 강력한 자극을 원하게 만들어 노화 속도를 빨라지게 한다"며 "대신 책 읽기 같은 활동을 늘리는 게 도움이 된다. 집중이 쉽지 않고 끈기를 요구하지만 노화 속도를 늦추는 데 긍정적"이라고 설명했다.

유통부터 금융까지, 산업계 전방위 '저속노화' 상품 경쟁.

저속노화 열풍에 기업들도 발 빠르게 대응하고 있다. 편의점 체인인 GS25는 잡곡 제품 라인업을 확대한 결과, 지난해 전체 양곡 중 잡곡 매출 비중이 역대 최고 수준인 15%를 돌파했다. 그릭 요구르트 제품도 2022년 5종에서 현재 10종 이상으로 확대했다. CU에서는 지난해 11월부터 올해 1월까지 닭가슴살 매출이 전년 동기 대비 51% 증가했으며, 최근 당 함량을 80% 줄인 가공유와 프로틴 쉐이크 제품을 선보였다.

세븐일레븐은 정희원 교수와 손잡고 저속노화 간편식 시리즈를 출시했다. 4개월간 개발 기간을 거쳐 나트륨 함량을 일반 상품 대비 최대 50%까지 줄인 제품을 내놓았다. 이커머스 업계도 움직임이 분주하다. SSG닷컴의 프리미엄 먹거리 전문관 '미식관'에서는 친환경 채소와 잡곡을 모아 판매하고 있으며, 컬리에서도 잡곡과 샐러드 상품군의 판매량이 전년 대비 두 자릿수 성장했다.

CJ제일제당은 혈당 관리에 적합한 저속노화밥 '햇반 라이스플랜' 시리즈를, SPC그룹은 프리미엄 브랜드 '파란라벨'을 통해 건강빵 대중화에 나섰다. 급식 업계에서도 현대그린푸드의 '헬씨에이징' 식단, CJ프레시웨이의 '슬로잇(SlowEat)' 캠페인 등 저속노화 트렌드를 반영한 서비스가 확대되고 있다.

심지어 금융권에서도 저속노화 트렌드를 반영한 상품이 등장했다. 타임폴리오는 글로벌 제약·바이오 분야에 투자하는 '글로벌안티에이징액티브' ETF를, 미래에셋자산운용은 나이키, 룰루레몬, 일라이릴리 등 저속노화 관련 기업에 투자하는 'TIGER 미국소비트렌드액티브' ETF를 출시했다.

저속노화 이후의 미래, '래디컬 론제비티'에 주목.

전문가들은 저속노화 트렌드가 개인뿐 아니라 국가 차원에서도 생산성을 높일 수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내놓고 있다. 경제 활동 기간이 길어지고 생산과 소비가 늘어나며, 노년기 질병 감소로 건강보험 건전성 확보에도 도움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구정우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는 "자산을 많이 보유한 노년세대 입장에선 노화와 건강 관리가 생존 문제이기 때문에 관심과 투자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이제는 젊은 세대도 저속노화에 관심을 갖는 만큼 관련 산업은 더 커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다만 저속노화를 통한 급격한 수명 연장은 어렵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이에 저속노화 이후 차세대 건강관리 트렌드로 주목받는 것이 '래디컬 론제비티(Radical Longevity)'다. 생활 습관 개선을 넘어 기술을 활용해 수명을 획기적으로 늘리자는 개념으로, 노화를 되돌리는 현대판 '불로장생'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미 글로벌 빅테크들이 이 시장에 적극 뛰어들고 있다. 아마존 창업자 제프 베이조스가 투자한 '알토스랩스'는 세포를 젊게 되돌리는 '역노화' 기술을, 구글 모회사 알파벳의 '칼리코'는 AI와 빅데이터를 활용한 노화 관련 생물학적 연구를 진행 중이다. 미래학자 피터 디아만디스는 "향후 10~15년 내에 역노화 기술이 개발될 수 있다"고 예측하며 관련 기술과 산업의 가능성을 높게 평가하고 있다.

SONOW / 2025-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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