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적 복수 콘텐츠의 열풍, 대중이 열광하는 이유.
최근 한국 문화계에서는 사적 복수를 다룬 작품들이 연이어 큰 인기를 누리고 있다. 학교폭력 피해자가 가해자들에게 복수하는 송하윤의 <돼지의 왕>과 김은숙 작가의 <더 글로리>가 대중의 뜨거운 호응을 얻었고, 복수 대행업체를 소재로 한 <모범택시>는 시즌1의 성공에 힘입어 시즌2까지 제작되었다. 복수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문학과 영화의 단골 소재였지만, 2000년대 이후 한국의 드라마와 영화는 특히 복수극을 자주 다루는 경향을 보인다.
왜 한국 대중은 사적 복수 이야기에 이토록 열광하는 것일까? 가장 직관적인 설명은 공적 제재 시스템의 실패 때문이다. 최근 인기를 끈 복수극에 등장하는 피해자들은 하나같이 국가와 사회의 보호망에서 소외된 인물들이다. <더 글로리>의 주인공 문동은은 잔혹한 학교폭력에 시달리지만, 학교, 경찰, 부모, 친구 중 어느 누구도 그녀를 보호하지 않는다. 오히려 방관하거나 동조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처럼 공적 시스템이 완전히 붕괴된 상황에서 피해자가 사적 복수라는 극단적 선택을 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흐름처럼 보인다. 많은 시청자들이 이러한 복수극의 서사를 단순한 허구가 아닌 '있을 법한 이야기'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이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자신의 경험이나 주변인의 사례와 이러한 이야기를 연결 짓고 있음을 보여준다.
사적 복수의 위험성과 근대 형사사법 체계의 의미.
그러나 사적 복수에 열광하는 사회는 분명히 문제적이다. 어떤 이유에서든 사적 복수는 현대 사회의 대안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현대 사회에서는 개인의 사적 제재가 허용되지 않으며, 형사사법 시스템에 의한 공적 처벌이 이를 대신한다. 피해자는 자신의 피해 사실을 바탕으로 신고하거나 고소할 수 있지만, 수사기관이 수사를 시작하는 순간 법적 절차에서는 제3자의 위치로 물러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수사는 경찰과 검찰이 담당하고, 기소는 검사가 맡으며, 검사는 공익을 대표하여 가해자를 처벌해달라고 공소를 제기한다. 그리고 독립기관인 법원이 이를 판단하여 최종적인 유무죄를 결정하는 구조다. 형사재판의 양쪽에는 검사와 피고인이 서 있을 뿐, 피해자는 증인 역할을 제외하면 방청석에서 재판을 지켜볼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피해자들은 종종 형사사법 절차에서 소외감을 느끼기도 한다.
피해자로부터 복수의 권한을 빼앗은 것은 단순히 국가가 효율적인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한 것만은 아니다. 복수가 피해자의 손에 달려 있을 때 어떤 부작용이 생기는지 우리는 역사적으로 충분히 경험했다.
그러나 피해자를 제3자 위치에 둔 것은 사실 인류의 진보적 산물이다. 역사적으로 사적 복수가 주류였던 시대에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탈리오의 법칙이 지배했고, 이는 종종 복수의 악순환을 낳았다. 피해자가 직접 수행하는 '합리적인 복수'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누가 잘못했는지 정확히 가려내고, 그 잘못의 정도를 객관적으로 판단하여 합당한 처벌을 내리는 것은 감정이 개입될 수밖에 없는 당사자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현대 복수극의 특징과 그 내포된 사회적 의미.
<더 글로리>는 사적 복수의 위험성을 의식하면서도 영리하게 서사를 구축했다. 주인공 문동은은 어설픈 용서와 화해 대신 확실한 복수를 택하지만, 그 방식은 합리적이고 절제되어 있다. <돼지의 왕>의 피해자 황경민이 가해자들을 직접 살해하는 것과 달리, 문동은의 복수 방법은 정교하고 전략적이다.
그는 어떤 격정이나 분노도, 심지어 웃음도 좀처럼 보여주지 않는다. 그의 복수는 냉정하고 치밀하며 계산된 것이다. 5명의 가해자들은 결국 죽거나 감옥에 가거나 사회적 생명이 끝나지만, 이는 단순히 문동은에게 저지른 폭력에 대한 응징만이 아니다. 그들은 문동은과 무관하게 자신들이 저질러 온 여러 악행의 결과로 몰락하며, 위선적 인간관계가 파탄 나면서 서로를 파괴하고 죽이는 결말을 맞는다.
문동은은 이 모든 것을 치밀하게 기획했지만, 정작 법적으로는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는다. 경찰조차 이 모든 사건이 문동은의 작품이라고 짐작하면서도 그녀를 사법 처리하지 못한다. 그녀가 직접적인 불법 행위를 저지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는 법과 정의 사이의 미묘한 간극을 보여주는 설정이다.
픽션을 넘어 현실이 된 사적 제재와 그 대안.
하지만 아무리 사적 복수가 합리적이고 절제되었다 해도 그것이 우리 사회의 해결책이 될 수는 없다. 문동은이 보여준 놀라운 절제력과 치밀함은 일반적인 피해자들에게 기대하기 어려운 특별한 능력이다. 그는 자신의 인생 전부를 바치고 모든 것을 걸어 복수를 준비했다.
오늘날 복수극의 인기는 국가적 시스템이 제 기능을 해야 한다는 대중들의 간절한 요청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더 나아가 대중들은 이미 영화나 드라마를 넘어 현실에서도 다양한 형태의 사적 제재를 시도하고 있다. 양육비를 제대로 지급하지 않는 부모를 고발하는 'Bad Fathers', 성범죄자와 싸이코패스 신상공개를 하는 '디지털교도소', 성폭력 피해자가 직접 대중에게 고발하는 '미투운동', 스포츠 선수나 연예인의 학교폭력에 대한 온라인 고발 등은 픽션이 아닌 우리의 현실이다.
일각에서는 한국이 범죄에 대해 '엄벌'에 처하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현상이 발생한다고 지적하지만, 이는 좀 더 복합적인 이해가 필요하다. 엄벌의 개념에는 '확실히 처벌한다'는 의미와 '강하게 처벌한다'는 의미가 모두 포함된다. 전자는 범죄를 저지르면 예외 없이 모두 적발되어 처벌받는다는 의미이고, 후자는 가해자에게 높은 수준의 형량을 부과한다는 뜻이다.
피해자가 가장 원하는 것은 피해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그들이 가해자의 엄벌을 원하는 것은 피해 이전으로 다시 돌아가기 위함이다.
피해자 중심의 사법 체계와 사회적 지지의 필요성.
영화와 드라마 속 주인공들이 사적 복수에 나서는 것은 일상으로 돌아가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가해자를 처벌하는 것만으로 피해자의 사회 복귀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지는 않는다. 피해자에 대한 심리적, 물질적 지원과 보호가 필요하고, 사회적 차원의 지지와 연대도 필요하다.
이는 가해자를 엄벌에 처하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렵고 오랜 시간을 요하는 과제다. 사적 복수는 당사자가 직접 할 수 있을지 몰라도, 피해자의 온전한 사회 복귀는 개인이 감당할 수 있는 일이 결코 아니다. 그것이야말로 사회의 공적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해야만 가능한 일이다.
근대 형사절차가 피해자를 소외시켰던 역사적 한계를 인식하고, 최근에는 피해자 중심의 사법 체계로 보완책을 마련하기 시작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다. 피해자의 절차적 권리를 강화하고, 피해자 지원 제도를 확대하는 등의 노력이 계속되고 있다.
복수를 다룬 영화나 드라마의 가장 큰 미덕은 피해자가 겪은 고통을 '극적'으로 보여줌으로써 대중의 공감을 이끌어내는 데 있다. 당사자가 아니면 정확히 인지하기 어려운 피해 경험을 누구나 공감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 이러한 매체의 힘이다.
그렇게 형성된 분노의 에너지는 위력적이지만 지속가능하지는 않다. 이제는 사적 복수에 대한 공감에 머무르지 않고, 단순히 '엄벌'이라는 빈약한 교훈에 그치지 않는 사회적 대안을 모색해야 할 때다. 사적 복수 서사가 환기한 분노와 공감의 에너지가 더 나은 공적 시스템의 구축으로 이어지길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