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년 만의 추경, 12.2조 중 66%는 국채로 충당.
정부가 18일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 겸 국무총리 주재로 임시 국무회의를 열어 12조2000억원 규모의 '산불대응 및 통상·AI 지원을 위한 추가경정예산안'을 확정하고 22일 국회에 제출하기로 했다. 이번 추경은 2022년 5월 이후 약 3년 만에 편성되는 것으로, 대통령 권한대행 체제에서 내놓는 역대 첫 추경이라는 점에서도 주목받고 있다. 특히 미국발 관세 전쟁의 충격과 최악의 산불 피해에 대응하기 위한 조치라는 점에서 그 배경과 의미가 남다르다.
이번 추경의 재원 조달 방식을 살펴보면, 전체 12조2000억원 중 무려 66%에 해당하는 8조1000억원을 국채 발행을 통해 충당하기로 했다. 나머지는 지난해 일반회계 세계잉여금 2000억원, 한국은행 잉여금 1조2000억원, 각종 기금여유자금 2조7000억원 등 총 4조1000억원을 활용한다. 이 중 한은 잉여금은 정부 세입 예상치와 실제 받는 확정치의 차이를 말하는데, 올해 한은의 정부 세입 납부 확정치가 5조4491억원(납부 예상치 4조2000억원)으로 늘면서 초과수납분으로 1조2000억원을 확보하게 됐다.
기금여유자금으로는 지난해 소상공인시장진흥기금 1조5000억원과 주택기금 2000억원의 여유자금, 중소벤처기업진흥기금 7000억원 등 총 2조7000억원이 투입된다. 김윤상 기획재정부 2차관은 "세계잉여금과 기금여유재원 등 가용재원을 최대한 활용해 4조1000억원을, 나머지 8조1000억원은 국채 발행을 통해 충당할 계획"이라며 "추가 발행되는 물량이 풀리더라도 국채시장에 유의미한 영향을 주진 않을 것"으로 내다봤다. 하지만 국채 발행 비중이 높아지면서 재정건전성 악화에 대한 우려도 커지고 있다.
국가채무비율 48.4%로 상승, 관리재정수지 적자 84.7조원 전망.
이번 추경으로 국채 발행이 늘면서 올해 국가채무는 당초 1273조3000억원에서 1279조4000억원으로 6조1000억원 증가할 전망이다. 이에 따라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채무 비율은 48.1%에서 48.4%로 0.3%포인트 상승하게 된다. 주목할 점은 GDP 대비 국가채무 비율이 2023년 46.9%에서 지난해 46.1%로 일시적으로 개선되었으나, 올해 48%를 넘어서면서 다시 상승세로 전환된다는 사실이다. 재정건전성 지표가 다시 악화되는 방향으로 돌아서고 있는 것이다.
더 심각한 것은 관리재정수지 적자 규모다. 당초 73조9000억원으로 예상되었던 관리재정수지 적자는 이번 추경으로 84조7000억원으로 10조8000억원이나 확대된다. 관리재정수지는 총수입에서 총지출을 뺀 통합재정수지에서 국민연금 등 4대 보장성 수지를 제외한 지표로, 실질적인 나라 살림 상태를 보여주는 중요한 지표다. GDP 대비 관리재정수지 적자 비율도 2.8%에서 3.2%로 확대된다. 이는 국가 재정의 건전성이 상당히 악화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재정 악화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당장은 경기 회복을 위한 마중물로서 재정의 역할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은 "시급한 정책의 골든타임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는 민생경제 회복의 소중한 마중물이 필요한 현장으로 적기에 투입되는 것이 너무나 중요하다"며 신속한 국회 통과를 호소했다. 관세전쟁의 충격과 장기화한 내수 부진으로 경기 침체가 심화하는 것을 막는 것이 급선무라는 설명이다. 정부는 이번 추경 사업이 집행되면 올해 경제성장률이 0.1%포인트 상승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시급한 정책의 골든타임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는 민생경제 회복의 소중한 마중물이 필요한 현장으로 적기에 투입되는 것이 너무나 중요하다.
관세 대응·산불 피해 복구·소상공인 지원에 집중된 추경 내용.
이번 추경의 지출 내역을 살펴보면 크게 관세 피해 대응과 산불 대응, 민생 지원 분야에 집중되어 있다. 먼저 미국 상호관세로 인한 피해가 우려되는 기업을 위해 15조원 규모의 저리 대출을 제공하고, 중소·중견기업 혹은 수출 유망분야 기업에 10조2000억원에 달하는 보증보험 혜택을 제공한다. 위기 기업 지원을 위해서는 5000억원의 기업구조혁신펀드를 조성해 구조조정을 돕는다. 이는 최근 미국이 발표한 관세 인상 조치로 인한 수출 기업들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대응책으로, 한국 경제의 수출 의존적 특성을 고려한 불가피한 조치로 볼 수 있다.
통상 위기에 대비한 자원 확보에도 상당한 예산이 배정됐다. 공공 비축 예산을 4000억원으로 2배 확대해 희토류·리튬 등 6개 핵심 광물을 조기에 확보할 방침이다. 현재도 13개 핵심 광물을 대상으로 비축이 이뤄지고 있지만, 최근 중국의 수출통제 조치로 공급망 불안 가능성이 커졌기 때문이다. 비축이나 수입선 다변화가 어려운 경제안보품목에 대해서는 국가가 국내 생산비용의 70%를 2년간 보조하는 파격적인 지원도 포함됐다. 아울러 통상위기가 고용불안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고용유지 지원금 요건을 완화하고, 지역 맞춤형 고용둔화 대응지원 사업을 새로 시작하는 내용도 담겼다.
또한 최근 발생한 대규모 산불 피해에 대응하기 위한 예산도 편성됐다. 산불 감시·진압장비를 확충하고 월 4만원의 산불 특수진화대 위험수당을 신설한다. 1만5000명분에 달하는 보호장비를 일제히 교체하고, 진화 인력과 장비를 현장에 신속 투입하도록 임도는 2배 수준으로 늘린다. 이 밖에도 싱크홀 사고 예방에 1259억원을 배정해 하수관로·도로 조기 개보수를 지원하고, 2548억원을 들여 4개 공항 안전시설을 보강하고 15개 조류 탐지레이더를 확충하는 등 재해·재난 대비에도 초점을 맞췄다.
세입 부족 대응 없어...2차 추경 가능성 고조.
이번 추경의 특징 중 하나는 세입경정이 반영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세입경정은 경기 상황 변화로 그해 세수가 얼마나 모자랄 것인지 가늠할 수 있어야 정확하게 계산할 수 있는데, 현재는 세수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기 어려운 시점이라는 판단에서다. 박금철 기획재정부 조세총괄정책관은 "관세정책의 향방과 내수 회복 지연이 분명히 세수 측면에서만 보면 불확실성 또는 하방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라며 "다만 지금은 4월이어서 법인세와 소득세, 부가가치세 등 주요 세목들이 얼마나 걷힐지 반영하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문제는 현재 상황으로 볼 때 올해도 상당 규모의 세수 결손이 예상된다는 점이다. 지난해에도 정부는 세수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었는데, 올해도 세수 상황이 크게 개선될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특히 미국발 관세전쟁의 불확실성과 이에 따른 경기 위축이 세수에 미치는 영향은 아직 이번 추경에 반영되지 않았다. 이에 따라 실제 세수 감소 폭이 파악되는 2분기 이후에는 세입경정을 위한 2차 추경이 불가피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김윤상 차관도 "이번 추경 외에도 필요한 경우 기금 변경 등 추가적인 재원 보강 방안도 지속 검토해 나가겠다"고 말하여 추가 대응 가능성을 열어두었다.
재정 전문가들은 올해 세수 부족과 추경 편성으로 관리재정수지 적자가 당초 예상보다 크게 확대될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한다. 특히 세계적인 금리 인상 사이클로 이자 부담이 커지는 상황에서 국채 발행을 통한 나랏빚 증가는 장기적으로 재정건전성에 부담을 줄 수 있다. 다만 대외 여건 악화와 최악의 산불 피해 등 예상치 못한 위기 상황에서 정부의 적극적인 재정 대응은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는 의견도 있다. 결국 관건은 추경 집행의 효율성과 목표한 경제 성장 효과가 실제로 나타나는지 여부가 될 전망이다.